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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이타성의 대명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9-18 오후 3:58:38
이메일 unit324@suwonmental.org 조회수 970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이타성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의사든, 음악가든, 철학자든 하나만 되기도 어려운 세상에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학 신학자,

그리고 루터교의 목사까지 역임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의료 봉사의 상징적 인물인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그입니다.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학 신학자 그리고 루터교 목사, 세계의 위인, 인도의 전사, 원시림의 성자, 괴테상 수상, 노벨평화상 수상


이 모든 것이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표현하는 수식어입니다.

 

 


오늘은 10개가 넘는 수식어를 가진 수식어 부자이자, 이타성으로 똘똘 뭉친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이하 슈바이처)는 1875년,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의 큰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소 병약하게 태어났지만, 목회활동을 하는 아버지 직업의 특성상 가정이 부유하지 못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약한 신체 대신 천재적인 음악성을 선물 받은 걸까요?

슈바이처는 유년시절부터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할 만큼 음악에 타고난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목회활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1893년, 청년이 된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 들어가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은 ‘밀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이지만, 사실 그는 의사이며 선교사이기 이전에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24세 때인 1899년에는 철학 박사를, 이듬해인 1900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03년부터는 슈트라스부르크 대학 신학부의 정교수로 근무하며 목회도 병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아프리카에 사는 흑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의학 공부도 시작합니다. 그리고 6년 뒤, 국가고시에 합격해 의사가 됩니다. 이듬해 결혼한 부인 역시 남편의 선교 활동을 돕기 위해 간호공부를 시작하여 간호사 면허를 취득합니다.

 

 


만발의 준비를 마친 슈바이처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현재의 가봉공화국)로 건너가 오고웨 강변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건립합니다. 백인 의사(=슈바이처)가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멀리서부터 수십 명 이상의 환자가 찾아온 탓에 사택 옆의 닭장을 임시 진료실로 사용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내가 주로 취급한 병은 말라리아, 나병, 수면병, 이질, 프람베지아, 침식성 종양이었다.

폐렴과 심장병 환자가 그토록 많은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뇨기 병도 많이 취급했다.

수술을 요하는 환자들은 주로 탈장과 상피병 환자였다.”

 

 

뜻깊은 일엔 장애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기금 부족으로 병원 운영이 어렵게 된 것입니다.

슈바이처와 그의 아내는 기금 마련을 위해 유럽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슈바이처가 유럽으로 돌아오자마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그 바람에 슈바이처는 독일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프랑스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슈바이처가 포로수용소에 갇혀있을 당시 슈바이처의 어머니가 프랑스 군마에 치여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훗날 슈바이처는 전쟁이 준 가장 큰 상처가 자신의 구금도, 차별도 아닌, 어머니의 사망이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 슈바이처는 전쟁이 본인에게 남긴 상처를 잊기 위해 마음을 다잡으며, 유럽 각지를 돌며 기금을 모읍니다.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 정신장애인을 위한 의료시설과 한센병 환자 거주시설 등을 추가로 건립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음악인으로서, 의료인으로서, 그리고 선교인으로서 살아갑니다.

 


병약한 슈바이처의 건강을 관리해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가정환경. 깊게 교류했던 선생님의 정신장애 발병과 자살.

교수이면서 의대 청강생으로서의 슈바이처를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 아프리카라는 미지의 곳에서 시작된 쓸쓸하고 험난한 선교활동. 전쟁 포로로의 생활. 전쟁으로 잃게 된 어머니. 그리고 선교활동으로 인한 어려움까지..

 

크고 작은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며 슈바이처를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어려움들을 슈바이처는 인애의 정신, ‘이타성’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따뜻한 슈바이처의 가정환경과 그의 기독교적 믿음이 바탕이 되고, 목회활동과 성찬예배를 통해 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 이야기가 자극제가 되어 슈바이처가 이타성을 지닌 의료봉사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98년의 어느 청명한 여름날 아침, 나는 귄스바흐에서 눈을 떴다.

그날은 성령강림절이었다.

이때 문득 이러한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여기에 대해 나도 무엇인가 베풀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러한 생각과 씨름을 하는 동안 바깥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조용히 생각해본 끝에 서른 살까지는 학문과 예술을 위해 살고,

그 이후부터는 인류에 직접 봉사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 참고문헌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428,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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