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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로버트 다윈] 아스퍼거 증후군을 신중성과 창의성으로 이겨낸 진화론의 창시자?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9-18 오후 4:27:20
이메일 unit324@suwonmental.org 조회수 1000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의 ‘신중성’과 ‘창의성’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하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신중성과 창의성으로 이겨낸 진화론의 창시자

 

 

 

 


진화하는 생명관에서 장엄함을 찾아낸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로버트 다윈(이하 찰스 다윈)

오늘은 찰스 다윈의 일대기를 통해 그가 겪었던 고난과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무언의 힘’에 대해서 함께 알아보도록 하습니다.


찰스 다윈은 1809년, 영국의 슈루즈버리에서 로버트 웨어링 다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덕에 형과 세 명의 누나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집 앞 마당과 근처 시골을 돌아다니며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누나 캐롤라인에게 읽기와 쓰기를 배웠습니다.

 


이처럼 응석받이 같기만 한 찰스 다윈을 위대한 생물학자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도와준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그가 9살이 되던 해 찾아왔습니다. 형과 함께 기숙학교로 들어가 생활하게 되면서 자연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찰스 다윈은 주위의 자연환경을 관찰하기 위해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 표본을 채집했고,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책을 꺼내 열심히 읽었습니다. 또, 화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형의 조수역할을 하면서 집에 갈 때마다 실험실을 이용했습니다.

 


훗날 생물학계에 한 획을 긋는 ‘진화론’을 발표할 찰스 다윈의 가능성이 보이는 대목이지만,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의 생각은 달랐나 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새 사냥과 운동에만 빠져있다가는 쓸모없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찰스 다윈에게 다윈가의 의사 전통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찰스 다윈을 자신의 조수로 몇 달간 데리고 있은 뒤, 16세 된 찰스 다윈을 의대생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찰스 다윈 역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아버지가 원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의학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는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수술 참관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제로 들어가라고 윽박질러도 다시는 수술을 참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것은 클로로포름 시대가 오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그 두 사건은 아주 오랫동안 날 괴롭히며 쫓아다녔다.”

- 찰스 다윈의 자서전 중에서 -

 

 

이후(1831년) 찰스 다윈은 해군 측량선 비글호에 자연학자로 승선해 달라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예상하듯이 아버지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찰스 다윈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선하여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의 섬을 돌아다닙니다.

뱃멀미와 문화적 차이로 인한 충격으로 힘든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훗날 다윈 찰스 다윈은 이때의 항해가 자신에게 대단한 지적 자극제를 주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여러 번의 항해와 탐사 후 그 관찰기록을 <비글호 항해기>로 출판하여 진화론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1859년에는 진화론에 관한 자료를 정리한 <종의 기원> 저작을 통해 진화 사상을 공개 발표하였습니다.

 


아버지와의 갈등 외에는 큰 고난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인생을 즐긴 것 같은 찰스 다윈.

하지만 그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난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합니다.

 


찰스 다윈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자주 이후 우울증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우울해 하는 것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버지로 인해 어머니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행동이 훗날 찰스 다윈이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는 것이 없게 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또한 찰스 다윈은 초등학교 시절 학생들의 재능과 개성을 살리지 못하는 암기 위주의 교육 때문에 수업에도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담당 교사로 부터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는 심한 비난까지 듣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교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찰스 다윈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자서전을 통해 ‘내 자신을 분명하고 간단하게 표현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을 느낀다’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이는 대학시절 겪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이 모임의 한 학생(다윈 자신)이 오랫동안 말을 더듬으며 얼굴을 붉히더니

마침내 서서히 말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제가 할 말을 모두 잊어버렸어요.’

가련한 이 학생은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고,

나머지 회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의 혼돈을 수습해줄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찰스 다윈은 ‘신중성’과 ‘창의성’으로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찰스 다윈은 이럴 적부터 목격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해하거나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몇 년이 걸리든 곰곰이 따져보고자 했습니다. 찰스 다윈의 신중성은 그가 가정적 어려움이나 정신적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또, 그는 다른 사람이 앞서 간 길을 따라가기보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창의성을 중요시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성향은 그가 비글호 탐험에서 수많은 자료들을 메모장에 정리하고, 이를 통해 <종의 기원> 써 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찰스 다윈의 성격은 그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하나인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됩니다.

 


아일랜드 트리니티 대학의 마이클 피츠제럴드 정신의학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다윈은 아스퍼거 증후군의 증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집중력, 보통 사람 이상의 집요함,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미세한 부분을 보는 엄청난 능력, 한 과제에 평생 매달리는 끝없는 열정, 독창적 연구를 하는 독립적인 정신을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찰스 다윈은 본인에게 드리워진 고난을 ‘신중성’과 ‘창의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극복해 낼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본인이 앓았던 자폐증을 이겨내고, 인류의 자연 및 정신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는 업적도 세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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